나는 누구인가?
한 씨족의 족보는 한 국가의 역사와 같은 것입니다.
한 국가에 역사책이 있으므로 해서 옛날에 있었든 중요한 모든 일들을 알 수 있는것과 같이 한 씨족에도 족보가 있으므로 해서 始祖를 비롯한 모든 先朝들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선조들의 偉業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옛날부터 전해오는 족보가 없었다면 어떻게 우리의 선조들을 알수 있으며 또한 일가간에 分派의 來歷과 일가간에 寸數를 알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족보는 우리선조들의 生․卒․年․月․日과 휘, 字號, 시호, 관직, 묘소 및 배위의 姓氏와 자녀들의 출산과 혼인관계 등 모든 것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여 있어서 우리들이 조상을 알게되고 또한 일가간에 촌수를 알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28년전에 경북경산경찰서 근무당시 제가 결혼해서 혼인신고를 하려고 호적을 떼어 보니 달성서씨라고 어른들이 가르쳐주셨는데 황당하게도 광산서씨로 되어있었고, 큰댁엔 대구서씨, 작은댁엔 달성서씨로 호적이 되어 있는데 우리집만 광산 서씨로 기재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경남 창원에 어느 종친어른한테 가서 인우 보증을 받으러 갔더니 상세히 말씀해주셨는데 오랜세월이 지나고 보니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중국에 사는 8촌이 방문해서 족보를 보면서 족보에 대한 공부를 좀 하였습니다.
자기의 姓을 타인에게 말할때에는 氏자를 붙이지 않는 것입니다.예를 들면 타인이 성씨가 뭐요하면 예 저는 달성서가입니다. 라고 말하면 됩니다. 아무리 현대사회가 물질문명이 발달하여 그의 말대로 서구화되고 우주선이 달나라를 왕래한다고 해도 과학이 자연법칙과 질서를 뒤 바구어 놓을수는 없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東邦禮意 나라라고 과시를 하여 왔었으며 우리나라외의 모든나라 사람들을 다 오랑캐라고 멸시를 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풍조는 어떻한가?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자랑으로 삼아온 倫理道德은 까맣게 잊혀져가고 자기자신의 존재 가치조차도 망각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오는 면치못할 부작용과 또는 현대 산업사회의 발전과정에서 선진국의 물질문명이 급속도로 도입된에에 대한 휴유증으로 돌릴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모든것들이 옛날 우리들의 선조들께서 오랑캐라고 무시하던 사람들의 발전상황인데 이제와서 우리는 그들을 쳐다보고 따라 배워야 하는 꼴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구화 되어가는 이시대에 족보얘기를 하느냐?고 하는데 족보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은 하나의 無識인 것입니다.
서구라고 하는 영국,불란서,서독등 많은 국가들이 족보를 가지고 있으며 이미 벌써 오래전인 1969년도에 미국 유타주에서는 미국족보학회창립 75주년을 맞아 기록보존에 관한 주제아래 내외학계의 많은 인사들을 초청하여 국제학회를 개최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명 삼자 중에는 세가지 개념이 들어 있는데 첫째자는 자기의 가문을 표시하는 姓이며 둘째자나 셋째자중 어느 한 자는 그가문의 係代를 표시하는 항열자이고 나머지 한 자는 자기를 표시하는 것인데 간혹 외자이름을 가진사람이 있지만 이런경우에는 무슨자 변으로 계대를 표시하고 나머지가 자기의 이름이 되는 두가지의 뜻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명자체가 좋은 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성명 삼자만 보아도 그사람의 족보상의 위치를 대략은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로 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족보에 대한 개념은 알고 있으나 더러는 족보의 이야기를 하게되면 봉건주의적이라고 하며 노인들이나 족보얘기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祖上없이 이세상에 태어 나지는 않었을 것입니다.
모든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자기의 조상이 있고 자기의 姓과 자기의 이름이 각각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조상은 자기의 뿌리이며 자기의 성씨는 자기조상의 象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조상과 성이 있어 한 뿌리의 가지로서 대대손손 전해오면서 한 씨족의 始祖로부터 係譜나 존속상황 또는 자신과 가족 그리고 친족들의 변천 상황등을 후손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느 가정이나 조상의 대한 족보나 계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불행하게도 조상에 대한 족보나 계보를 알지 못하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우리들의 혈통과 뿌리에 대한 정확안 인식부터 가져야 하겠기에 여러 사적에 기록된 사실을 근거로 하여 미비하지만 우리 대구서씨의 이이들에게 우리선조들의 대하여 다소나마 바르게 알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대구 서씨들은 옛날부터 본관을 대구와 달성으로 혼용하여 다같이 쓰고 있었으니 대구 서씨라고 해도 맞고 달성서씨라고 하여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호적에도 큰집은 대구서씨로 하였고 작은대과 우리집은 달성서씨로 하였습니다. 그까닭은 이조말 우리나라의 호적법이 처음으로 제정되면서 호적을 계출할 당시에 본관은 대구로 한집은 대구가 본관을 달성이라고 한집은 본관이 달성으로 된것입니다.
그렇게 애당초 처음에 어떻게 해서 관향을 대구와 달성으로 쓰게 되었나 하는 그 원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주 옛날에 만드러진 동국여지승람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이책에 이르기를 대구는 별칭이 달서이며 신라때에는 달구, 화현이라고 하였고 그뒤에는 수창군이라고 고쳤으며 이조시대에는 도호부를 두었는데 달성은 대구부의 서쪽으로 4理가 된다고 하였고 석축으로 성이 쌓여 있으며 그석축의 주위가 944척이나 되는데 그안에 우물이 셋이있고 연못이 셋이 있으며 천연적으로 군수창이 되고 성이되여 있으나 폭과 주위가 혐소하여 성이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하였으며 지금은 인가는 없고 다만 옛관청의 건물이 섯등 주춧돌만 남아 있을뿐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대구광역시에 있는 달성공원인데 그안에 들어가 보면 양측옆과 뒤가 성과 같이 쌓여 있고 앞으로만 내다보이는 것이 삼테미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같이 달성은 대구의 고호이며 별칭이기에 옛날부터 우리들의 선조들께서도 대구와 달성을 다같이 관향으로 써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의 관향에 대해서 아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님니다. 그문제가 뭔고하니 대구서씨라고 하면 문제될것이 없겠지만 달성서씨라고 하는서씨가 우리들 말고 따로 또 한 씨족이있기 때문입니다. 달성서씨중에 판도공후손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되겠읍니다.(판도공의 휘자는 晋(나라진)자이시고 판도공의 후손들도 우리 소륜공의 후손들과 함께 대구지역에 같이 살면서 관향도 대구와 달성으로 다같이 하였으며 이들 판도공파의 족보도 우리족보의 별보 즉 부록으로 수록하여오다가 영조대왕 13년 서기1755년에 그들대로 제자를 달성서씨세보라고 하는 을해보를 창간히여 펴냈으며 대구서씨와는 완전히 분류가 되어 수백년을 지내온 지금 우리가 그냥 달성서씨라고만 한다면 소륜공의 후손인지 판도공의 후손인지 알수 가 없게 되어 있으니 족보를 처음 창간보부터 대구서씨 세보로 하여온 우리 소륜공의 후손들은 가급적이면 관향을 대구로 일관하는 것이 옳을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관향을 달성이라고 한다해도 망발되는 것은 아닌것이니 관향을 대구라고 하든 달성이라고 하든 간에 달성서씨중에 판도공 후손이 있다는것만은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잠간 참고로 말씀드리면 휘자는 죽은이 이름 휘 자로서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을 말할때에는 휘자가 무슨자와 무슨자라고 말하는것입니다.
시조 : 소륜공 1世
중시조 : 약봉 충숙공14世
달성위 : 도위공15世(약봉할아버지의 4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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