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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인제 김부대왕유적지

지운/서동식 2008. 5. 21. 20:45

김부대왕 유적지가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기슭에 있다고 처음 밝힌 이는 19세기 초의 유명한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었다. 그는 그곳을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이라 했다고 분명히 증언했다. 그러면서 자세한 것은 “인제 읍지(邑誌)에 실려 있으며 경순왕은 곧 신라의 항왕(降王)인 김부”라고 부연하였다. 그러나 1984년 부안, 통천 김씨들이 그들의 조상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김부대왕이라고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대왕각은 당초에 통나무로 된 전각이었으나 1945년에 단칸의 기와집으로
지었는데 이때 김부대왕의 신위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신위도 당초에 있던 것을 다시 쓴 것으로 보여 지는데 거기에는 "敬順王弟一子金富之神位"라고 쓰여져 있어서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김부대왕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김부리(金富里)와 식량리(食糧里)

신라가 고려 당나라에 항복을 한 뒤 일이였다. 김부왕 마의태자는 부왕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일천년 사직을 경하게 내 놓을 수 없다 하여 항의 하다가 실패하자 천주의 원한을 가슴에 품은 채 비빈(妃嬪)과 수십명의 수족병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향하여 왕도 경주를 떠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남면 김부리까지 와서는 피로한 몸을 쉬기 위하여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계시었다. 이러해서 뒷날 이곳을 김보옥촌 김보동으로 부르다가 김부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수족병 중에 가장 충성스러운 맹장군이 의병을 초모하여 왕건의 군사를 물리치는 것이 상책이라고 김부왕께 고하자 김부왕도 이것을 찬성하여 곧 좌우의 여러 신하들을 여러 고을로 보내어서 의병을 초모해 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지금의 양구 군량리 넓은 벌에서 초모해 온 의병을 일변 훈련을 시키고 한편으로는 그
곳에다 군량고를 쌓고 군량미를 거두어 드렸다. 그러나 이 거사를 하기전에 맹장군은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므로 장군을 잃은 수백인의 의병들도 비통한 나머지 가슴을 쳤을 뿐이고 맹장군의 유골을 묻은 뒤로는 산지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뒷날 군량고가 있던 곳을 군량리라 하였다고 한다. 남면 김부리에는 당시를 입증하는 대왕당(大王堂)과 애화가 전해 오고있다.


김부리의 옥쇄 바위

인제군 남면 김부리의 거짓말 북쪽 골짜기인 하단지골 북쪽 산밑에 위치하고 있는 바위가 있으니 약1000년 전부터 이 바위에 얽힌 전설이다. 신라 경순왕 9년 10월에 왕이 군신회의(群臣會議)를 열고 고려에 귀속하기를 제의하였을 때 군신 중에는 혹 가하다고 하는 파가 있었고 혹 불가하다는 파도 있었다 한다. 특히 왕자(속전 麻衣太子)는 비분한 어조로 말화되「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오직 마땅히 충신과 의사(義士)와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나라를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때에 말 것이니 어찌 천년사직을 일조에 쉽사리 남에게 내어줄까 보냐」하였다. 그러나 왕은 시랑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국서를 가지고 고려에 가서 귀부를 청하였으니 신라는 역대 56왕, 992년으로 붕괴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며 부왕을 작별하고 개골산(지금의 금강산)으로 들어가 일생을 마치기전에 남면 김
부리에 여러 해 동안 머물렀다. 이때 신라의 뒤를 이으려고 김부대왕이라 칭하였는데 이곳 김부리에는 형태가 두 개로 포개져 있는 바위가 있었으니 이 바위에다 옥으로 만든 임금의 도장인 옥쇄를 감췄던 곳으로 여러 빛깔의 뱀이 가끔 나와 돌아다니는데 옥쇄를 지키는 것이라 하여 그 후
부터 이 바위를 가르켜 지금도 옥쇄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인근의 서북쪽 산에는 대왕각이 있어 김부왕을 위하여 음력 5월5일과 9월9일에 취떡과 제
물을 차려놓고 마을 사람들이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는 등 이곳에 얽힌 옛이야기가 많이 전해 오고 있다.


김부대왕 묘

김부대왕 묘 터라고 전해져 내려오는 이곳은 오미자골 입구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옛날에 김부대왕 묘가 이 자리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 최씨네가 묘를 썼다로 한다. 최씨 집안은 이곳에 묘를 쓴 후 그 자손들이 벌을 받아 죽고 망했다고 전해 오는 데 지금도 지 자리에는 쓰러진 망부석과 묘비가 남아 있다 한다.

묘 비문에는 "…통정대부 최씨…숙부인…"의 글자가 보인다. 통정대부는 조선시대 때 정3품 직위로 그 직책은 오늘날의 차관급에 해당된다. 이곳에 묻힌 사람은 나라에 죄를 지어 이곳에 유배되어 왔거나 당쟁을 피해 이곳에서 은거하다가
죽어 여기에 묻혔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사복최씨…라고 씌여진 묘비가 2개 발견되고 있는데 "사복"이란 관직은 고려와 조선조 때 임
금의 수레나 가마를 관리하던 것인데 이것은 김부대왕의 전설 술구네미와 어떤 연관이 있을 법도 하다. 이곳은풍수지리에 의하면 묘터로써 명당이라 한다. 그런데 상당히 넓은 공간 지역을 남겨두고 제장도 없이 산마루 끝에 묘를 써야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공간지역에 김부대왕 묘가 있을 것으로 가상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이곳은 김부탑과 갑둔탑을 좌우로 거의 같은 거리를 두고 술구네미 절터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퍽 의미있다 하겠다. 1973년 이곳 앞으로 자동차 길을 내기 전까지는 묘 앞에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연못을 메우고 길을 낼 때에 굉장히 큰 비석이 묻혀 버렸다는 이야기가 내려오
고 있다.

수레너머(술구네미)

인제군 남면 갑둔리 서낭거리와 김부리 사이에 큰 고개가 있다. 지금은 자동차가 교차하면 원활히 잘 다닐수 있도록 넓게 도로가 잘 닦여져 있지만 옛날에는 수레만 억지로 다닐 수 있는 소로의 길로 고개가 있었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김부대왕이 이 고개를 넘어 다녔는데 수레를 타고 넘다가 산이 하도 험하고 칡넝쿨이 많아 수레를 내버려두고 걸어서 넘었다고 한다. 수레 두 대를 만들어 고개 양쪽에 두고 고개만 걸어서 넘어가고 평지에서는 수레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수레를 남겨 두었던 고개 양쪽을 모두 수거너머라고 부른다 이 권력자는 칡넝쿨 때문에 다니기가 불편하다 하여 부하들에게 칡넝쿨을 모두 캐어 없애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갑둔리와 김부리 일대에는 칡넝쿨이 매우 드물고 있어도 무성하지 못하며 자생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 고개를 "술구네미"고개라고도 하는데 술구네미는 수레너머의 사투리이다.


마의태자의 후손.

마의태자 후손이 여진(女眞)에 들어가 금나라를 일으켰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도 발견된다.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 3월조에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국호를 금이라 했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平州) 승(僧) 금준(今俊)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거주했으니 이가 금의 시조다’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김행(金幸)의 아들 극기(克己)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古乙) 태사(太師)라 하고 고을이 활라(活羅) 태사(太師)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劾里鉢)이라 하고 계자(季子)를 영가(盈歌)라 했는데, 영가가 웅걸(雄傑)이어서 중심(衆心)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하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의 같은 예종 4년(1109) 6월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
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은 소상하게 신라 왕손이 여진 땅에 가서 먼저 완안부의 지도자가 되고 어떻게 해서 금나라를 세우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의 한국사 개설서인 ‘신단민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그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 했다. 또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이라 하고 동쪽은 생여진이라 했다. 요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 아래에서 임금을 태사(太師)라 했다. 그리고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납북 사학자 손진태도 ‘금태조는 황해도인야’라는 논문에서 금태조 아골타가 스스로 고려는 ‘부모 지방’이라 했고, 중국측 기록 ‘금지’에는 금나라 왕은 본시 신라인이요 호가 완안인데 완안은 한어로 왕이란 뜻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금태조가 신라인이라는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 전한 이야기여서 ‘고려사’에 기사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와서 실학자 이수광이 그의 ‘지봉유설’에서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송나라 사람이 금나라에 갔다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송막기문(중국의기록)에는 금나라의 시조에 대한 기록이 있다. ‘금나라가 건국되기 이전 여진 부족형태일 때 그 추장이 신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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