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에 진달래 능선이 있는데요.
‘산불조심’이라는 표지판이 무색하도록 온산이 꽃불이래요.
아직 나무 잎들이 색이 될 만큼 온전히 자라지 못한 때인지라
진달래불은 멀리에서라도 한눈에 알 수 있죠, 봄꽃들이 다 그렇지만.
진달래가 스스로 알아서 피는 줄 알았더니, 그런 게 아니고요.
긴 겨울 잘 견뎠다고, 이제부터는 얼음이 녹아 물로 흐르고
새들이 날아와 우짖을 것이라고,
계절의 축제를 벌이느라 산에서 불 밝혀놓은 것이었대요.
촛불을 진달래에게 숨겨 놓은 것이었대요.
일 년에 딱 한번뿐인 축제래요, 불꽃 축제를 벌이기는.
특별히 봄 축제는 사랑축제로 불리는데요.
잘은 모르겠지만, 무릇 사랑에는 견뎌야만 하는 겨울이 있기 마련이라는 뜻을
전하자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그런 축제에 초대된 것만으로 신나는 일이었어요.
어쩐지...
산에 들어서자마자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더라고요.
새싹들이 아직 여린 빛으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어요.
여느 때의 산처럼 조용하고 엄숙한 그런 모습이 아니라
잔칫집처럼 들떠있는 것 같기도 하고
외출이라도 하려는 처녀처럼 곱게 색조화장을 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찬란한 예감이 내 안에서 일렁이고 있음을 금방 알았어요.
진달래랑 처음 눈을 마주칠 때부터 내 가슴이 뛰었던 거지요.
네 가슴에 불 지르러 왔노라.
그래서 서둘러왔노라.
오늘은 너를 그냥 보내지 않겠노라.
엷은 진달래꽃들이 하도 예뻐서
살포시 입 맞추고 있는 사이에 내 가슴에 불 질렀나 봐요.
문득 정신이 아뜩하다 싶었는데, 벌 나는 소리처럼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렸어요.
흔들리고 싶을 때 흔들리라고
입술을 내어주라고.
우물쭈물하지 말고 고백하라고, 봄날은 쉬이 가버리고 말테니 ...
고백하는 입술처럼 향긋한 술이 또 있을까요.
뜨거운 잔이 있을까요.
내 입술이 한 사람의 잔이 되고
한 사람의 입술이 나의 잔이 되어 주었을 때 말예요.
숨이 멎는 것 같았어요.
이 계절은 그 순간을 위해 모두 숨을 죽이고
나는 지상에서 가장 황홀한 배를 타고 나아갔어요.
내 안에 툭, 던져진 불씨 하나가
벼랑에서 어렵게, 어렵게 살아나는가 싶더니
이내 계곡 한 자락을 쉽게 차지해 버리고
끝내 능선을 타고 온 산을 태워버릴 줄이야...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사랑이란 것이 이런 건가요.
아름답게 타오르는 것을 보면 모두가 내 마음 같으니 말예요.
바람에 흔들리는 진달래 꽃술마다
내 사랑이 흔들리며 피어오르고 있었어요.
저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꽃이 또 있을까.
하나도 남김없이 일제히 터뜨리고 마는 저 순결한 열정을
진달래 말고 또 누가 보여줄 수 있을까.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진달래가 그토록 아름다운 사랑인 줄을 왜 느끼지 못했을까.
붉은 마음을 함박웃음으로 터뜨리는 진달래의 환희를.
바위틈 사이로 한 떨기 작은 꽃망울을 내어놓는 당당한 삶을.
자유로운 정신을...
그동안 얼마나 숱하게 많은 봄들을 나는 그냥 흘려보냈던 것인가.
이제야 겨울은 물러갔어요.
그리고는 너무도 아름다운 봄이 내 안에서 태어났어요.
스스로 물러간 것이 아니라 진달래불길이 나를 태우면서 그런 거예요.
그대의 향기로운 입술과 뜨거운 눈빛과 사랑스런 노래로써
온 계곡을 봄으로 만들어 준 거예요.
아, 황홀하여라.
아지랑이와 같은 봄 멀미
진.달.래.
2004. 04. 26 .
휘서 ^^